원주민의 전통문화를 기록해 후손에 남기고자 했던 사진가 크리스 레이니어와 김미희 시인의 시 <유산>, 신경림 시인의 <거인의 나라> 소개
우리는 기술발전과 혁신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발전 속도는 자연환경 훼손은 물론 생물 다양성에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급격한 생활 패턴의 변화는 독특한 전통을 간직한 세계의 문화와 언어, 원주민 공동체의 전통문화마저 훼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 레이니어(Chris Rainier)는 이러한 재앙적 손실을 막고 미래 세대에 전승하기 위한 사진을 찍는 데 일생을 바친 사진가입니다. "다색의 세계에서 태어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내 손주들, 아니 우리 아이들 모두가 언젠가는 단색의 세계에서 깨어나서 다른 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라고 마가렛 미드는 말합니다. 크리스 레이니어 역시 이점을 깊이 인식한 사진가였습니다. 그는 고대의 문양과 문신, 의식, 원주민의 삶과 독특한 전통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원주민의 초상과 예식, 고대 문양을 몸에 새긴 문신과 가면을 통해 문화와 전통을 간직하고자 했던 크리스 레이니어의 사진과 어울리는 시를 소개 할까 합니다. "소라는 죽었으나 집은 죽지 않았다. 집이 없는 이들에게 집을 남기고 떠났다. 집게는 소라 집에 들어가 살면서 문패를 바꿔 달지 않는다. 소라의 집이었음을 누구나 안다. 하나가 떠나면 누군가가 또 들어가 집을 살린다. 집에 체온이 흐른다. 팔팔 살아 움직인다. 소라의 체온이 영원하다" <김미희, 유산, 전문> 김미희 시인의 시 유산입니다. 껍질만 남겨놓고 소라는 사라졌지만, 껍질 속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생명이 소라의 전통과 체온을 오래도록 이어갑니다. 또 다른 시 신경림의 거인의 나라입니다. "모두들 큰 소리로만 말하고 큰 소리만 듣는다. 큰 것만 보고 큰 것만이 보인다. 모두들 큰 것만 바라고 큰 소리만 좇는다. 그리하여 큰 것들이 하늘을 가리고 큰 소리가 땅을 뒤덮었다. 작은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아무도 듣지를 않는 작은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보지를 않는 그래서 작은 것 작은 소리는 싹 쓸어 없어져버린 아아 우리들의 나라 거인의 나라" <신경림, 거인의 나라, 전문> 신경림 시인은 큰 소리에 묻혀 사라져 버린 작은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문명은 휩쓸기를 좋아합니다. 댐이라는 거대 문명에 토착민은 터전을 잃고 떠돌게 되며 결국 댐이 붕괴되는 시점에는 소수 문명은 붕괴하고 맙니다. 크리스 레이니어의 작업은 이러한 의미에서 오래도록 간직되어야 할 유산입니다.
원주민 사회에서 가면이 갖는 의미와 정호승 시인의 시 <데스 마스크>
크리스 레이니어가 방문한 뉴기니에는 여전히 석기 시대의 삶과 죽음, 탄생,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원시문화가 살아 숨을 쉽니다. 그는 그곳에서 인류 시작의 본질을 발견하고 원주민의 삶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특히 그는 30년 넘게 가면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가면은 인류가 탄생한 이래로 신과 영혼을 기리고 죽은 자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축하하는 다양한 의미로써 사용돼 왔습니다. 크리스 레이니어는 뉴기니의 전통 가면 의식에서 부터 몽골의 대초원, 남미의 정글, 서아프리카의 사막, 히말라야의 고산, 멕시코의 망자의 날 축제까지 가면 전통에 대한 다양한 의식을 기록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날이 죽는 날이구나, 죽고 사는 것이 물소리 같구나, 나는 이제 잠과 죽음을 구분하고, 나무와 숲을 구분하고, 바다와 파도를 구분하고 사는구나, 죽음은 용서가 아니라 용서이구나, 사랑은 용서의 심장과 함께 사는구나,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진실을 말할 용기를 지니지 못하고, 만년필에 잉크를 넣지도 못하고, 늘 빈 밥그릇을 들고 서 있었지만, 나의 데스마스크에 꽃이 피면 그 꽃에 당신만은 입맞춤 한번 해주길 바란다" <정호승, 데스마스크, 전문> 현대 사회에서의 가면은 위장과 위선, 풍자와 비판의 성격이 더 강한 듯합니다. 그러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가면의 의미는 영적 세계와의 신성하고 심오한 연결, 숭배와 춤이 곁들여져 죽음과 삶의 강력한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표식을 남겨 영원히 기억하리. 레이니어의 문신 사진과 신미나 시인의 시 <문신>
고대로부터 인간은 바위나 대지, 심지어 자신의 몸에 표식을 남겼습니다. 바위에는 벽화의 형태로, 땅에는 서클의 형태가 미스터리하게 남아 아직도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또한, 고대로부터의 표식은 인간의 몸에 문신의 역사를 새겼습니다. 고대 암각화처럼 삶의 의식을 피부에 장식했습니다.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정체성, 관계, 소속감 등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또는 예식의 증표로 문신을 새겼습니다. 크리스 레이니어에게 문신은 또 하나의 전통문화였으며, 과거로의 여행의 문을 여는 접속 코드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8여 년 동안 전 세계를 여행하며 전통적인 문신의 사례를 발견하고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자신의 육체에 새긴 문신은 육체로부터 정신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며 수많은 바늘구멍은 우주에 수놓아진 별빛입니다. "무심한 포즈로 팔짱 끼고 서 있는 나무에게 심심한 일 하나 만들어주고 싶어 별 하나 없는 검은 보자기 같은 밤하늘 바늘로 찔러 구멍 사이로 새어 나오는 별빛 아프게 뚫린 자리 따끔거리며 빛나는 당신 이름 석자 수놓아도 죄 되지 않을까, 이봄" <신미나, 문신, 전문> 신미나 시인의 문신입니다. 시인은 문신을 별빛에 비교합니다. 바늘로 콕 질러 따끔거리는 상처는 별의 탄생이자 문신의 새김입니다. 검은 보자기 같은 몸은 아직 생성되지 않은 초기 우주이며 문신을 새김으로서 우리는 우주 탄생의 비밀을 목격하게 됩니다. 크리스 레이니어 역시 고대 문신을 통해 고대인의 숨결은 느끼고자 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