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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시] 무명사진가 비비안 마이어와 미스터리한 원판 필름 속 자아를 찾는 여정

by 마이너스+ 2024. 4. 11.

ⓒ 비비안 마이어

발견된 무명사진가 비비안 마이어와 황규관 시인의 시 <무명>

비비안 마이어는 '미스터리'라는 수식어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무명 사진가였습니다. 1926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녀는 가정 불화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평생을 그저 그런 가난한 보모 일을 하며 살았지만 사진활동은 꾸준히 이어 갔습니다. 독신으로 살면서 뉴욕과 시카고 등지에서 사진을 촬영한 그녀는 현실의 자신보다 앵글 속 자신의 이미지를 더 사랑한, 일생을 카메라 속에서 숨어 지낸 사진가였습니다. 그녀의 죽음 또한 참담했습니다. 2008년 12월 추운 어느 날  시카고 로저스 파크의 빙판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고 이듬해 4월 26일 불운했던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장례는 그녀가 17년간 보모로 보살펴왔던 존과 매튜, 레인 겐스버그 삼 형제에 의해 치러졌습니다. 그녀의 육신과 함께 묻힐뻔한 사진은 삼 형제가 비비안의 초상을 요약해 <시카고 트리뷴>에 게재하며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처럼 비비안 마이어는 타인에 의해 발견된 사진가입니다. 그녀의 삶과 사진은 아직도 발굴이 끝나지 않은 유물처럼 재조명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다음은 황규관시인의 시 <무명>입니다. "어둠을 비추는 힘은 불빛에게 있지 않다. 가을햇빛에 드러나는 세계의 형형색색이나 쪽빛 하늘에 뜬 흰 뭉게구름이 가장 낮고 고독한 영혼의 눈빛에게 나타나듯 무명이 백광을 품고 있다.  바람도 함성도 모두 무명의 가늠할 수 없는 힘이 만든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거대하게 일렁이는 종잡을 수 없는 무명이"<황규관, 무명, 전문> 시인은 '무명이 백광을 품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평생을 무명사진가로 살았던 비비안 마이어에게 너무도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인화되지 않은 15만장의 미스터리 원판 필름 상자와 정다연 시인의 시 <비밀>

 2007년 역사책에 쓰일 과거 거리의 사진을 찾기 위해 경매장을 찾은 아마추어 역사학자 존 말루프는 인화되지 않은 필름 수십만 장이 들어있는 상자를 발견합니다. 그는 필름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마이어의 대부분의 사진들을 수집했습니다. 또한 사진 전시회와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를 제작해 아무도 몰랐던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녀의 어두운 과거와 사진은 이렇게 세상에 드러났고 창고에 방치됐던 15만여 장의 사진은 그녀 생전의 삶과는 다르게 역설적이게도 사후에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은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생애가 드러나지 않고 인화되지 않은 원판 필름처럼 영원히 미스터리한 존재로 남아 있기를 원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상자 가득 담긴 필름은 그녀의 고난과 겹핍의 결정체이며 인간 세상에 퍼트려선 안 되는 지독한 불운의 씨앗처럼 잠겨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이 정령 판도라의 상자 일지라도 열수 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사진은 너무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정다연 시인의 시 <비밀>입니다. 친구의 비밀을 듣게 된 시인은 '비밀 안에서 물고기들이 평화로워야 하는데'라고 말하며 누군가의 비밀은 버려도 간직해도 아픈 상처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이건 내 비밀이야 아무 사이도 아닌데 한 아이가 말했다 앞으로 영원히 마주칠 일 없다는 듯이 다행히 그 말을 하고 가는 아이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진 듯했는데 나는 끙끙 앓았다 그 비밀이 무거워서 한여름 혼자서 물이 가득 찬 어항을 옮기는 것 같았다 새어 나가면 안 되는데 실수로 깨뜨리면 안 되는데 비밀 안에서 물고기들이 평화로워야 하는데 나 때문에 잘못될까 봐 껴안고 있었다 -중략- 누군가의 비밀은 버려야 살 수 있는 거 누군가의 비밀은 간직해야 살 수 있는 거 어느 쪽이든 덜 아픈 건 아닐 거야"<정다연, 비밀 중 발췌> 비밀 안에서 비비안 마이어와 그녀의 사진들이 평화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거리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건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시 <거리에서>

어린 시절 좌절과 감정적 결핍을 경험한 그녀는 물건을 버리기 어려워하고 모으는 강박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장애로 인해 그녀는 물건에 집착하게 되었고 수십만 장의 필름 또한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촬영한 방대한 양의 사진 중에는 위트사랑, 빈곤, 우울, 죽음의 이미지가 섞여 있었고 거리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거리의 쇼윈도나 유리 거울에 비친 중첩된 레이어 속의 자신의 모습을 많이 남겼습니다.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숨겨온 그녀가 아이러니하게도 카메라 앞에서는 스스로를 내보이며 자아를 찾는 여로를 밟아갔습니다. 카메라는 그녀와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였으며 앵글 속 사각 프레임은 그녀를 가두는 상자가 아니라 알라딘의 램프처럼 소원을 들어주는 도구였습니다. 스스로에게 포집된 자화상은  매미가 세상밖으로 나가기 위해 오랜 기간 땅속에 묻혀 성충으로 변태과정을 거듭하 듯 우리는 그녀의 수많은 자화상의 변화를 통해 그녀가 자아를 찾아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경이로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비비안 마이어가 느꼈을 마음속 자화상을 표현한 듯한 시를 소개할까 합니다. "문을 열고 나가니 안이다 그 문을 열고 나가니 다시 안이다 끊임없이 문을 열었으나 언제나 안이다 언제나 내게로 되돌아온다 문을 열고 나가니 내가 있다 내게서 나누어지는 물음들 나는 문이다 나를 열고 나가니 낭떠러지다 닿을 듯 말 듯 한 낭떠러지들 넋 나간 슬픔처럼 떠다닌다 나는 나를 잠그고 내가 싼 물음들을 주워 먹는다" <김사이, 거리에서, 전문> 김사이 시인의 시 <거리에서>입니다. 거리의 사진가 마이어가 피사체를 찾아 거닐다 언듯 언 듯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열고 촬영하고 여닫는 모습이 상상되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