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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시] 스페인 내전과 로버트 카파 그리고 카파이즘의 탄생

by 마이너스+ 2024. 4. 4.
ⓒ 로버트 카파

스페인 내전의 총성에서 분쟁을 기록한 로버트 카파와 김정환 시인의 <총성과 신화>

전쟁은 영토분쟁, 정치권력 다툼, 경제적 이익, 인종 및 종교 갈등, 민족주의 등 다양한 이유로 발생합니다. 로버트 카파(Robert Capa)가 활동했던 1930년대는 세계적 경제 불황으로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긴장을 악화시켰고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포함한 극단주의 정치 운동이 극렬하게 발원한 시기였습니다. 스페인 역시 20세기 초 내내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긴장은 경제 불황으로 더욱 악화되었고, 이는 스페인 정치를 더욱 양극화시켰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좌파,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세력이 연합한 공화당과 우파, 우익이 연합한 국민당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 분쟁은 스페인 내 좌파 및 사회주의 세력뿐만 아니라 자국의 이익 증진의 기회로 여겼던 유럽 여러 국가의 지원을 받았으며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전조가 되었습니다. 카파는 분쟁을 기록하는 것이 곤경에 처한 스페인 국민의 인식을 높이고 공화당 측의 국제적 지원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그의 여자친구인 게르다 타로(Gerda Taro)도 그와 함께 스페인으로 동행한 사진작가였으며, 이는 그가 갈등을 기록하도록 더욱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로버트 카파는 스페인 내전에서 병사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을 포착한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으로 그 시대에 가장 용감한 사진가 중 한 명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진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연출 논란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 당시 그의 사진은 전쟁의 잔인함과 혼란을 포착했을 뿐만 아니라 분쟁과 그 영향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김정환 시인의 '총성과 신화'라는 시입니다. "총성이 울리고, 신화가 깨졌다. 그리고 당분간 역사가 드러난다. 그럴 뿐이다. 지리멸렬이 이제사 드러난다 그럴 뿐이다 우리는 깨진 거울 파편을 줍는다 우리는 무엇, 생애는 가장 간절하고 아름다운 그 무엇? 눈물이 옷을 벗고 더 날카로운 눈물을 드러내는 그 틈새로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또 돌아가신다"<김정환, 충성과 신화, 전문>. 로버트 카파는 전쟁과 테러와 학살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비추는 깨진 역사의 파편을 줍는 수집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앙드레 프리드만은 왜 로버트 카파가 되었나?

로버트 카파의 본명은 앙드레 프리드만입니다.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로버트 카파는 1931년 정치적 박해와 반유대주의를 피해 독일로 건너갔으며 나치 집권 이후 다시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그가 로버트 카파로 개명하게 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프랑스로 망명해 연인인 게르다 타로를 만난 이후 로버트 카파로 개명하게 됩니다. 반유대주의가 고조되는 시기에 유럽에 살고 있는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난민으로서 유대인 같지 않은 이름을 채택하는 것이 여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또한 단순하고 기억하기 쉬우며 강렬하고 남성적인 미국식 이름을 채택하여 서구 독자들에게 더 시장성 있게 만들었습니다.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을 선택한 구체적인 이유와 상관없이, 이 이름은 용기 있고 영향력 있는 전쟁 사진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연인이자 동료였던 타로가 1937년 7월 촬영 중 탱크에 치여 숨지자 카파는 타로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절망에 빠진 카파를 일으켜 세운 건 카메라였습니다. 카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1944년 6월 6일  D-Day라고도 알려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유일하게 취재했습니다. 카파는 총알 세례 속에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군인의 모습을 포착하여 군인들의 혼돈과 용감함을 직접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초점이 흔들린 카파의 사진은 오히려 당시의 공포와 긴박감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라이프지는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는 설명을 붙여 게재했고 종군기자로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카파이즘의 탄생과 종군기자의 심리를 묘사한 정다연 시인의 <전쟁과 테러>

목숨 걸고 전쟁터를 누비며 종군기자의 전설을 만들어낸 카파는 1954년 5월 25일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하다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아 불꽃같은 삶을 마감합니다. 그의 당시 나이는 41세였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기자정신을 ‘카파이즘(capaism)’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 같은 카파의 사진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를 전투의 최전선으로 이끌었고 그의 용기와 헌신은 종군기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카파이즘은 진실과 진정성을 추구하면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위험을 수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또한 카파이즘은 신체적 위험, 정서적 고통, 도덕적 딜레마 등 역경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카파이즘은 사진작가들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전쟁의 생생한 현실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포착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전쟁은 막대한 규모의 인명 손실을 가져오고 개인, 가족, 지역 사회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줍니다. 사회적 혼란, 심리적 트라우마, 인권 침해등 수많은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합니다. 전쟁은 모든 기반시설을 파괴하고 경제적인 발전과 번영을 저해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전쟁의 참혹함의 진실이 무엇인지 정확히 전달하려는 종군기자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다음은 종군기자들의 도덕적 딜레마와 심리적 트라우마를 잘 보여주는 시를 소개할까 합니다. 정다연 시인의 시 '전쟁과 테러'입니다. "사진을 관람하려면 순서를 지켜야 했다 사람이 많았다 '뜨거워요 제발 구해 주세요' 따라 읽는다 네이팜탄에 옷이 불타 찢긴 소녀가 벌거벗은 채 카메라 앞으로 뛰어들고 있다 그 옆에 걸린 아이는 미동이 없다 뒤엔 독수리 한 마리 안아주지 못해서 너무나 너무나 미안했다*(케빈 카터) 새를 쫓아내고 나무 아래서 울던 남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내일 전선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아직 죽을 준비가 돼 있지 않아요**(사와다 교이치) 말한 사람은 어느 날 살해된 채 발견된다 매끈한 신체들이 이어진다 화살표를 따라 쭉 나아가면 어둠이 끝나고 다시 환한 빛 장막을 걷고 나온 사람들이 플래시를 터뜨린다 포토 존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려면 자신의 순서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차례차례 열리는 셔터 웃는 피사체 마음껏 전시한다" <정다연, 전쟁과 테러,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