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매개로 한 듀안 마이클의 자화상 <The Illuminated Man>과 휘트먼의 시를 통한 정체성 탐구
듀안 마이클은 내러티브 스토리텔링과 개념 예술의 요소를 통합하여 전통적인 사진 관습에서 벗어나려 한 사진가입니다. 1968년에 제작된 듀안 마이클(Duane Michals)의 상징적인 자화상 "빛을 받은 남자(The Illuminated Man)"는 관찰자들을 성찰과 명상의 영역으로 유혹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빛과 그림자가 상호 작용하는 수수께끼 같은 이 사진은 존재의 이중성, 즉 진실과 환상, 명료함과 모호함, 깨달음과 무지의 자아를 발견해 가는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손전등의 빛을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장노출로 만들어낸 이 사진은 조명이라는 매개체가 주는 전통적인 의미와 작가의 내면을 조명한다는 은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내부에서 나오는 듯한 부드럽고 영묘한 빛에 휩싸인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모호한 요소를 더하여 이미지 뒤에 숨겨진 정체성을 탐구하게 합니다. 이 자화상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측면 중 하나는 그가 손으로 쓴 텍스트입니다. 손으로 쓴 텍스트는 그의 생각, 감정, 그가 전달하려는 내러티브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The Illuminated Man"에서는 손으로 쓴 텍스트가 인물 앞에 떠 있는 것처럼 나타나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경계가 더욱 흐려집니다. 예술의 영역에서는 서로 다른 형태의 표현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융합이 자주 일어나고, 이때 시각적 매체와 문학 사이에서 조화로운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시의 영역으로 들어가 듀안 마이클 사진의 함축적인 의미와 어울리는 월트 휘트먼의 시를 소개합니다. 월트 휘트먼은 "나 자신의 노래"에서 자기 탐구와 개인과 거대 우주와의 상호 연결성이라는 주제가 풍부한 서정적인 풍경을 발견합니다. 휘트먼의 시는 "빛을 받은 남자"와 같이 영혼을 탐구하는 여행을 시작하도록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이 시는 듀안 마이클 사진의 신비함과 어울리며, 우리에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간 정체성의 복잡성을 그리도록 캔버스를 제공합니다. "빛을 받은 남자"와 "나 자신의 노래"는 둘 다 자아의 전통적인 개념에 도전하며 유동적인 정체성을 직관하게 합니다. 인간 형태의 파편화된 묘사로 듀안 마이클의 자화상은 자아성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면적이며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따라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마찬가지로, 휘트먼의 시는 모순과 복잡성을 인간 경험의 필수적인 측면으로 인정하면서도 각 개인 안에 포함된 다양한 자아를 찬양합니다. 특히 이 작품들은 개방성과 호기심으로 관람자와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진화하는 정체성의 본질의 여정을 걷도록 유도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원자 당신도 있을 테니까”, “나는 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초대한다. 나는 한가로이 기대이며 헤매며 여름풀의 이파리를 바라본다. 나의 혀, 내피의 원자가 이 토지, 이 공기로 빚어졌고”, “나는 크다, 나는 다량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라고 표현하며 장벽을 초월해 자신으로부터 우주로 이어지는 자아를 보게 합니다. 휘트먼은 “당신 자신의 영혼을 욕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배척하라. 그러면 당신의 바로 그 몸이 위대한 한 편의 시가 되리라.”라고 말하며 모든 만물에 자아가 깃들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거울, 자아 성찰의 또 다른 매개체. 실비아 플레스의 시 <Mirror>
듀안 마이클의 자화상에서 빛나는 얼굴은 영혼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단순한 육체적인 외모를 뛰어넘는 진실과 통찰력을 드러내는 아이디어를 상징합니다. 두 번째로 소개할 실비아 플레스의 "Mirror"는 듀안 마이클의 자화상과 어울리면서도 또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거울이라는 매개체가 주는 특성과 사진이라는 매개체가 주는 특성은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드러나게 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하지만 Sylvia Plath는 듀안 마이클과는 반대로 거울을 통해 자신의 가장 빛나는 모습이 아닌 가장 슬프고 불안했던 과거와 현재를 확인합니다. "나는 은밀하고 정확하다. 나는 선입견이 없다. 무엇이든 보면 즉시 삼키고 있는 그대로일 뿐, 사랑이나 증오로 흐려지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거울의 특성을 표현합니다. "대부분의 시간 나는 반대편 벽을 응시하지. 분홍빛 얼룩이 묻은 벽을 오래 바라보았기에 그게 내 심장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그러나 벽이 깜박거리고 얼굴들과 어둠이 우리를 자꾸 갈라놓지. 이제 나는 호수다. 한 여인이 허리 굽혀 나를 내려다보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려고 샅샅이 찾아본다. 그리고 그녀는 저 거짓말들, 촛불이나 달빛을 향해 간다. 나는 그녀의 등을, 뒷모습을 충실하게 비추지. 그녀는 내게 눈물과 불안한 손놀림으로 보상해 주지. 나는 그녀에게 중요해, 그녀는 왔다가 가곤 하지." 이제 거울은 누군가를 보여주는 수동적인 매개체가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직접 보는 능동적인 매개체가 됩니다. 자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마이클의 사진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게 거울은 명료함과 정직함을 반영하며 왜곡 없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대면하게 합니다. 진정한 자아를 드려다 본다는 것은 때론 너무도 잔인한 일입니다. 거울 속 자신이 모습에 절망한 실비아는 절망하고 맙니다. 절망의 끝에는 안타까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우물 속 자아 들어다 보기,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
"빛을 받은 남자(The Illuminated Man)"라는 제목 자체는 단순히 남자를 문자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내면의 자아에 대한 성찰을 암시합니다. "빛을 받은 남자"는 어둠 속에서 빛의 등불이 되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우주 안에서 자아와 자신의 위치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안내합니다. 빛과 어둠, 자아와 다른 것의 대비 속에서 예술가와 시인 모두 더 큰 자아 인식과 깨달음을 향한 길을 밝히며 자아 발견의 여행을 시작하라고 손짓합니다. 듀안 마이클의 자화상에서 '빛을 비춘다'는 행위는 깨달음과 영적 각성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자기 발견의 심오한 순간을 겪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사진 속 자화상의 모호함은 의심의 여지를 남깁니다. 조명은 존재를 드러나게 한다는 점에서 때론 깨달음이 될 수도 때로는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입니다. 시인은 산모퉁이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감정의 변화를 겪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우물이라는 한계에 갇힌 자아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인 불안과 일치합니다. 우물 안에서도 자연은 자유로운 변화를 거듭하지만, 시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못난 모습으로 비칩니다.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가지만 우물에도 볕 들 날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볕이 든 우물 속 자아는 필경 깨달음을 향한 통로가 되어줄 것입니다.